이야기꾼 - 인생의 희노애락을 담다

1937년, 소련은 만주를 위성국화 하고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확장에 두려움을 느꼈다.

스탈린은 당시 연해주에 살던 조선인들이 일본의 스파이일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18만 명에 달하는 조선인이 열차에 태워져 시베리아 너머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당했다. 

소련군은 조선인들을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에 내려놓고 사라졌다. 

사실상 거기서 죽으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조선인들은 맨손으로 토굴을 파고 겨울을 난 뒤, 봄이되자 보따리 속에 가지고 온 벼와 채소 씨앗들을 뿌렸다. 
당시 중앙아시아의 토질은 소금기가 많아 농사에 적합하지 않아 역사적으로 정착보단 유목민들이 지나쳐가던 곳이었다. 
소련당국도 여기선 농사를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조선인들은 근성 하나만으로 결국 벼농사를 성공시켰다. 

그것 뿐만 아니라 현지인들이 먹지 않는 다른 야생 채소들도 찾아내어 상품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7년이 흘러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갈 무렵, 열차에서 또 다른 무리들이 쏟아져 나왔다. 

소련에 의해 카프카즈 지방에서 끌려온 체첸인들과의 만남

이들은 카프카즈 지방에서 끌려온 체첸인들이었다. 1941년 독소전쟁이 벌어지자 스탈린은 소련 산하의 수많은 비러시아 민족들이 나치독일과 손을 잡고 반기를 들 것을 경계했다. 특히 수백 년에 걸쳐 러시아에 저항해온 체첸인들이 걸리적거렸다.

스탈린의 체첸 제거 작전

그루지야 출신이었던 스탈린은 체첸인들이 얼마나 반골기질인지 잘 알고 있었다. 1942년, 독일군이 청색작전으로 바쿠까지 밀고 들어오려 하자 스탈린은 12만 명의 소련군을 투입하여 체첸인들을 소거시키는 작전을 펼쳤다..... 1942년 2월, 소련군 위문공연단이 체첸 각지의 유르트를 방문하여 잔치를 벌이고 공연을 펼쳤다. 체첸인들이 구경하려 몰려들자 소련군들은 갑자기 총칼을 들이대며 사람들을 강제로 트럭에 태웠다.


멋모르고 구경나온 체첸인들은 거의 빈손으로 끌려가게 됐다. 반항하는 자들은 즉각 처형됐고, 게릴라 거점인 샤토이 지역 에선 주민 700여 명이 마구간에 갇혀 불에 타 죽는 사건도 일어났다. 또 혹한에다 화물 열차에 짐짝처럼 실려 가다 보니 서너 명 중 한 명꼴로 얼어 죽거나 굶어 죽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강제로 끌려온 체첸인을 도와준 고려인들

기차에서 내린 거지꼴의 체첸인들이 찾아와 먹을 것을 구걸하자 고려인들은 7년 전 자신들의 모습이 떠올랐는지, 이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타민족에서 배타적인 체첸인들은 말이 안 통하는 동양인들이 베푸는 친절에 당황했다. 하지만 그들의 호의에 적의가 없다는 걸 깨달고는 진심으로 감사함를 표했다. 

동병상련 체첸인과 고려인들의 교류

고려인 여인들은 체첸 어린이들을 입히고 아껴주었다. 밀농사 밖에 지을 줄 몰랐던 체첸인들은 고려인들을 따라 벼 심는 법을 배웠다. 
심지어 체첸인들이 믿는 이슬람교에서는 개고기를 하람(haram)이라고 부르면서 금기시 한다. 하지만 고려인들과 함께 살게 된 체첸인들은 개고기를 거리낌 없이 잘 먹게 됐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고 흐루시쵸프가 권력을 잡게 됐다.

그리고 1956년부터 소련 각지의 강제이주된 민족들에게는 귀환이 허용됐다. 대부분의 체첸인들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쪽을 택했다. 
그들은 10년 동안 친해진 고려인들과 헤어지는게 아쉬웠는지 자신들과 함께 가자고 제안을 했다.... 그리하여 일부 고려인들이 체첸인들과 함께 카프카스 지방으로 떠났고, 이들은 그로즈니를 시작으로 북 카프카스 전역에 터를 잡고 살게 됐다. 

체첸인들의 고향에 터를 잡은 고려인들

고려인들은 이 곳에서도 농사를 지었다. 특히 이 지역에서 드물던 오이, 참외, 배추 같은 야채와 채소, 과일농사를 지었다.  맨날 양고기와 빵, 버터만 먹고살던 체첸인들의 식탁에는 야채와 과일이 오르기 시작했다. 

고려인들이 전파해준 수박

특히 고려인들이 전파해준 수박은 이 지역의 특산물이 되어 러시아 전역에서도 당도가 높고 맛이 좋다고 알려졌다. 체첸 전쟁 참전용사들의 수기에는 러시아군들이 지천에 널린 수박을 자주 서리해서 먹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브라뜨에서 다닐라가 체첸인 과일장수한테서 사 먹는 수박엔 이런 유래가 담겨있음....)

현재 카프카스 지방에선 고려인들이 먹던 김치가 현지화 되면서 지역 토속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냉전이 끝나고 소련이 해체되자 체첸인들은 또 다시 러시아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1994년 이츠케리야 체첸 공화국은 러시아를 상대로 독립을 선포했고 옐친은 그로즈니로 군대를 보냈다. 전쟁은 2년간 계속되었고 체첸뿐만 아니라 카프카스 지방 전역은 혼란의 도가니였다. 그로즈니에 살 던 1500명가량의 고려인들은 삶을 터전을 잃고 크라스노다르, 볼고그라드, 로스토프 같은 지역으로 이주했다. 1995년 북 카프카스 전역에 사는 고려인들은 5만 명에 달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체첸 전쟁에 휩싸인 된 고려인들 

솔제니친이 쓴 '수용소 군도', 톨스토이의 '카프카스의 포로' 같은 작품 속에서 체첸인들은 매우 거칠고 난폭한 부랑배로 묘사된다. 체첸 전쟁에서도 체첸인들은 러시아인들에게 마구잡이로 테러와 학살을 벌이며 어떻게든 독립을 쟁취하려고 했다. 그로인해 엄청난 어그로를 끌었고 푸틴의 러시아군은 2000년 열압력탄을 쏟아부어 그로즈니를 평탄화 시켜버렸다. 수도를 빼앗긴 체첸 반군들은 여러 군벌로 사오 분열하였고 카프카스 산악지대로 도망쳐 항전을 이어가거나 아니면 다른 국가로 도망쳤다.

고려인들을 존중하는 체첸 군인들

그렇게 전쟁이 지속되던 2001년, 체첸 반군들이 지나가던 민간인 버스를 납치한 적이 있었다. 그 버스에는 한 무리의 고려인들이 타고 있었는데, 승객들을 위협하고 소리를 지르던 체첸군인들은 고려인들에겐 매우 정중한 태도로 '무례를 범해서 죄송합니다.' 라고 말한 뒤 아무것도 빼앗지 않고 보내주었다고 한다.

따뜻했던 체첸인과 고려인의 역사속 만남... 그리고 현재

그들이 도대체 왜 그랬는지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어렸을 적 그들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중앙아시아에 끌려가서 고생할 때 고려인들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같은 동네에 살았던 친절한 고려인 아저씨 아줌마의 모습이 떠올라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간에 21세기에 들어와서 체첸은 러시아에 합병됐고 한국과의 교류는 전무 하지만, 두 민족의 첫 만남이 인류애가 넘쳤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체첸에 불고 있는 한류 열풍

2020년 기준으로 그로즈니의 Chechenskiy Gosudarstvennyy Pedagogicheskiy Universitet 대학교에는 약 20여명의 한국인 유학생들이 재학 중이다... 참고로 체첸에서도 젊은 여성들에게 한류가 인기 많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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