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꾼 - 인생의 희노애락을 담다

이순신

이순신 장군은 16세기 말 조선의 명장이자 구국영웅인 충무공으로, 임진왜란 및 정유재란 당시 조선 수군을 지휘했던 제독이다.

정유년 4월 13일(1597년 5월 28일) 《난중일기》

어머니를 마중하려고 나가는 중에 아들 울이 종을 보내 "아직 배 소식이 없다."하였다. (중략) 조금 있으니 종 순화가 와서 어머니의 부고를 알렸다. 뛰쳐나가 가슴을 두들기고 발을 동동 굴렀다. 하늘이 캄캄하다. 즉시 갯바위로 달려나가니 이미 배가 와 있었다. 이 애통함을 글로 다 적을 수가 없다."

정유년 4월 19일(1597년 6월 3일) 《난중일기》

나라에 충성을 다하고자 하였으나 죄가 이미 미쳤고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고자 하였으나 부모마저 돌아가셨네.
세상에 어찌 나같은 사람이 있으랴?
속히 죽느니만 못하다.

1597년 당시 벌어진 사건

1597년 2월 26일 - 왕명을 거부했다는 죄로 삼도수군통제사직을 삭탈당한 후 한양으로 압송
4월 1일 - 출옥 후 백의종군
4월 13일 - 한양으로 압송된 자신을 보기 위해 어머니께서 배 타고 올라오시다가 향년 83세로 사망.
4월 19일 - 관원들의 재촉으로 장례도 못 치르고 다시 임지로 출발. 이때부터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으로 인하여 난 중일기에는 '비통', '통곡'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게 됨.
4월 27일 - 순천에 도착하자, 도원수 권율이 휘하 군관을 보내어 조문함....
5월 4일 - 돌아가신 모친 생신 날이라 일어나자마자 하염없이 통곡함. 하늘도 슬퍼했는지 오후에는 비가 하루종일 내림.
5월 6일 - 꿈에서 돌아가신 두 형님(희신, 요신)이 나타나 이순신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하염없이 통곡함.
7월 15일 - 칠천량 해전으로 인하여 조선 수군 궤멸
7월 18일 - 칠천량 해전 대패소식을 전해 듣고 하염없이 통곡하다가 도원수 권율에게 본인이 직접 연안으로 가서 확인하겠다고 건의. 도원수 권율은 흔쾌히 허락.
8월 3일 - 조정에서 선전관이 와서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
8월 21일 - 하루종일 몸살을 앓고 10번 토하다가 잠도 못 자고 앉아서 밤샘. 23일까지 이 상태로 지내고 배도 못 탐.
9월 2일 - 배설이 도망감.
9월 11일 - 홀로 배 위에 앉아서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신세를 한탄하며 눈물을 흘림
9월 16일 - 명량대첩
9월 25일~26일 - 몸살과 오한을 앓음
10월 1일 - 본가 아산이 적의 공격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 이 회를 보내 상황을 파악하도록 함. 그 와중에도 아산으로 보낸 아들 걱정
10월 14일 - 21살 셋째 아들 이면의 전사 소식을 전해 들음
10월 15일 - 잠을 못 잠
10월 16일 - 부하들 앞에서 슬픔을 참다가 결국 노비 강막지의 소금창고로 가서 통곡
10월 17일 - 향을 피우고 하얀 띠를 두른 후 통곡
10월 19일 - 꿈에서 고향집에서 보낸 노비가 나타나자 죽은 아들 생각에 또다시 통곡. 그날 밤 코피를 한 되 가까이 쏟음.
12월 30일 - "비통할 따름이다"라는 말로 1597년 정유년 난중일기는 끝남.
4줄 요약
1. 파직+압송+백의종군+모친상 4 연타. 심지어 어머니
장례도 못 치르고 떠남.
2. 칠천량 해전으로 박살 난 조선수군을 재건하고 명량해
전을 대승으로 이끎
3. 셋째 아들 사망.
4. 이 모든 것이 전부 1년 만에 일어난 일

https://story.hobbyspace.org/archive/?vid=142 

 

충무공 이순신 장군에게 1597년 당시 벌어진 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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