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꾼 - 인생의 희노애락을 담다

프랑스 대혁명

1789년, 부르주아들이 주축이 된 프랑스 혁명군은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국을 선포했다.

그러나 모든 프랑스 국민들이 이 혁명에 동참한 것은 아니었다.

많은 농민들은 팍팍한 삶이 더 나아지기를 바라기는 했으나 왕족과 귀족, 성직자들을 모조리 때려잡고 뒤엎자는 과격한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프랑스 서부의 시골 마을 '방데'

프랑스 서부의 시골 지방 '방데도 마찬가지였다. 방데의 귀족 - 성직자 - 농민들은 서로 협력하며 불만 없이 잘 지내고 있었다. 교회의 재산은 마을의 공동재산이었고 귀족과 사제는 마을 공동체의 일원이었다.

침략자로 돌변한 프랑스혁명정부

프랑스혁명정부는 군대를 보내 귀족과 사제들을 잡아들이고 교회의 재산을 몰수했다. 방데 주민들에게 그들은 구체제로부터의 해방을 선포하는 혁명군이 아니라 갑작스레 나타나 공동체를 무너뜨리고 이웃을 잡아가는 침략자에 불과했다.

물가 폭등, 왕정시대보다 심한 세금에 불만 폭발한 민심

사회적 혼란 때문에 물가는 폭등하고 왕정시대보다 더한 중과세가 부과되었다. 농민들의 반감과 불만이 점점 커져가는 와중에 징병제와 국민 총동원령이 내려졌다. 젊은 남자들은 끌려가고 식량을 압류당했고 온 가족이 전쟁 준비를 해야 했다. 결정적으로 부르주아들은 징집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소문이 퍼지자 이미 임계점에 달해있던 방데의 민심은 폭발해버렸다.

혁명에 저항하는 농민 봉기

비슷한 불만을 품고 있던 근처 지역 농민들까지 합세하면서 방데의 봉기 군은 수만 명 이상으로 불어났다. 혁명정부는 농민 봉기를 반혁명'이라고 규정하고 진압을 시작했다.

농민군은 처음에는 무섭게 세력을 불려 나갔으나 병력과 훈련에서 앞서는 정부군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방데 주민 남녀노소 가릴 거 없이 학살하는 무자비 한 보복

정부는 방데 주민 전체를 '프랑스인이 아닌 비적 떼'라고 비하하며 남녀노소 가릴 거 없이 학살하는 무자비 한 보복에 들어갔다. 

아이는 말로 짓밟고 아기는 총검으로 찔러 죽이고 남녀는 묶어 수장시키고 임산부는 포도 압착기로 살해했다. 반란에 동참한 다른 지역도 비슷한 보복을 당했으며 최소 20만 이상이 학살당했다.

학살에 대한 양심 고백

이제 방데는 없습니다. 여자들과 그 자녀들이 우리 칼에 죽었습니다. 나는 그들을 사브네의 소택지와 숲에 묻었습니다. 내게 내려진 지시에 따라 나는 말발굽으로 어린이들을 짓이겼으며 부녀자들을 살해했습니다. 적어도 이런 조치로 도적의 자식들은 더 이상 태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비난할 포로도 두지 않았습니다. 나는 모두 없애버렸습니다.
- 프랑수아 조세프 웨스텔만, 프랑스군 장군, 정부 공안위원회 보고서

학살에 대한 인정도 사과도 하지 않는 정부

프랑스 정부는 학살에 대해 아직까지 사과하지 않고 있다. '자국민을 학살한 프랑스'를 인정하는 것은, 프랑스 대혁명을 근간으로 세워진 근대 프랑스의 가치가 부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인들에게 방데 학살은 오늘날까지도 불편한 진실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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