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꾼 - 인생의 희노애락을 담다

나는 흙수저 집안에서 태어났다. 부모 탓, 집안 탓 하지 말라는데, 탓이 아니고 그냥 흙수저 맞음, 팩트다.

 

우리 집 자가가 있긴 한데, 그거밖에 없음. 진짜 11평짜리 물새는 노후 연립이다. 지방에 있어서 값어치도 없고 그냥 개미굴 같다. 거기서 부모랑 나랑 세 가족이 평생을 살고 있다.

 

부모님 두 분 다 선천적으로 다리가 불편하다. 그래서 부업방에서 부업하거나 복지사업 일자리 같은 거나 공공근로만 함. 거기에 각종 지원금들 자잘자잘하게 받는다. 그걸로 먹고 삼.

 

선천 장애 부모로부터 나온 나는 다행히 사지는 멀쩡했는데, 능지도 딸리고 몸도 존나 약한 멸치로 태어났음. 키는 173 정도라 평균인데 멸치 그 자체다. 머리가 안 좋았고, 기흉이랑 천식도 심해서 네블라이저 달고 살고 있음. 지금 이 순간까지도.

그래서 초중고 내내 왕따는 기본이었다. 멸공 던창이라고 하던데, 디씨에서? 멸공던창 들어봤지? 딱 나야. 멸치 공익 던파충.

 

초중고 왕따로 살면 당해 본 애들은 안다. 사람 대하는 것도 무섭고,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존나 비웃겠지? 하는 생각도 들고. 사람을 대할 때마다, 저 사람이 갑자기 나를 곤란하게 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 때문에 온몸이 얼어버린다.

누구랑 말하고 나면 등근육이 굳어서 담이 걸려서 어깨죽지가 아플 정도로 긴장한다. 대인기피증 심각했다. 근데 가족이랑 있을 때는 말 잘했지만, 남들 앞에만 서면 발가락 끝까지 얼어서 말 한 문장을 제대로 못 말할 정도였는데, 돈이 없어서 정신병원을 못 갔다.

 

나 딱 20살 때부터 딱 30살 때까지, 장장 11년간 그렇게 반 장애인으로 사람 구실 못 하고 살았다. 20대를 통째로 반 병신 새끼로 날렸다. 알바 한 번을 안 하고 집에서만 살았다. 가끔 엄마 몸 불편해서 장 볼 때 짐꾼으로 밖에 나가는 거 빼곤 안 나갔다.

 

근데 집에서 부모님은 아무 말 안 하고 맨날 부업방 가시고 복지급여 타 오시고 나 먹으라고 밥해주고 라면 사오고 청소 빨래해주고 다 해줬다. 나 발병신 아닌 것만 해도 축복이라고 맨날 말하면서 잘될 거라고 해줬다. 부모는 몸 불편해도 열심히 근로해서 나 먹여 살리고, 복지급여 받은 걸로 먹고 살고 집 같지도 않은 개미굴 집이라도 있어서 나를 항상 보살펴줬다.

 

근데 나는 1, 2년도 아니고 11년을 인간쓰레기 벌레처럼 살면서 20대 날렸다. 그 긴 시간 동안 남 탓만 늘고, 나 왕따당한 거 생각하면서 혼자 화내고, 그러다가 던파만 해대고, 인터넷 판타지 소설 읽어 대고.

 

근데 그러다가 31살에서 32살 되는 겨울날 사건이 하나 터졌다. 내가 기흉이랑 천식 심하다 했잖아. 집에서 자다가 폐 쪽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파서 응급실을 갔는데, 기흉 증상인 거다. 수술을 해야 하는데 돈이 없었음. 응급실 비용 정도는 낼 수 있었는데 수술비용은 못 냈다. 내려면 몇 푼하지도 않는 이 낡은 집까지 팔고 해야 됐다.

 

부모님은 나 기흉에 천식도 있어서 나 죽을까 봐 무조건 수술하라고 했는데, 나는 그 순간 너무 비참하고, 내 자신이 싫고 진짜 내 자신을 죽이고 싶을 만큼 몸이 떨렸다. 그래서 수술 안 하고 그냥 그 추운 새벽에 집까지 이악물고 뛰어왔다. 걸어서 20분 거리를 얼어 뒤질 거면 뒤져버리자는 마음으로 뛰어서 집까지 왔다.

 

부모님이 울었고, 너 잘못되면 우린 사는 의미가 없다고 했다. 우린 너 하나 때문에 일하고 돈 벌고 먹고사는 거라고 말했다. 그 말 듣고 너무 괴로웠다. 난 이미 다 알고 있었는데, 부모님은 나 하나뿐이란 것도, 장애 있는 부모 밑에서도 사지 멀쩡히 나와서 부모님이 악착같이 나 키워서 먹여 살린 것도 나는 다 알고 있었는데, 십수 년간 사람 구실도 못 하고 부모 가슴에 못만 박아댔다.

 

다 알면서도 그랬었다. 왕따를 당하든 어쩌든 부모를 생각하면 이악물고 살았어야 했는데, 병신 새끼같이 살았다.

그래서 기흉 약처방만 받고 그때부터 알바 다니기 시작했다. 처음에 알바 구할 때 31살이라 하니까 사람 취급 안 하더라. 처음 구한 일용직 닥트 설치는 부모님이 폐 망가진다고 안된다 해서 편의점 알바 야간알바 구해서 했다.

 

근데 부모님은 어딜 가든 장애가 있어서 외적인 장애라 더더욱 심하게 무시받고 더 심하게 차별받고 더 힘들었을 거 생각하니까 내가 힘들어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이상한 분노가 생겨서 날 대놓고 깔보는 사람들한테 나도 공격적으로 대응하고, 말대답도 날카롭게 했다. 그리고 야간에 매장에 혼자 있을 때 혼자서 말하고 욕하고 하면서 말하는 연습도 엄청나게 해댔다.

 

그렇게 알바해서 부모님 돈 갖다줬는데 부모님은 절대 안 받겠다고 했다. 그래서 스피치 학원 다닐 수 있었다. 버스타고 40분 거리에 있었는데 그래도 열심히 다녀서 진짜 많이 좋아졌다. 남들 앞에서도 말할 수 있게 되었음. 그렇게 같은 편의점에서 오래 일하면서 자신감도 좀 늘고 사람도 대하고 취객 아저씨들도 대하고 하면서 3년 정도 동안 많이 발전했다. 말도 조리 있게는 아니지만, 내가 생각한 거 적당히 말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내가 34살이 되고, 이번에 첫 직장으로 마트 주차팀에 들어갔다. 말이 많이 필요 없고, 간단한 안내만 하고 수신호랑 주차 관리 배워서 일하고 있음. 알바 따로 계약직 따로 뽑았는데 계약직으로 들어갔다. 월급 한 달에 세금 빼고 180 정도 받는다. 처음에 엄청 혼나고 어리바리했는데, 일이 많이 어려운 건 아니라서 익숙해졌다. 일하는 직원분들이랑 알바 동생들이랑도 지금은 웃으면서 많이 친해졌다. 다행히 사람들이 착해서 운이 좋았다. 9월 입사해서 지금 3개월째 일하고 있다.

 

저번 달에 첫 직장 첫 월급 들어온 걸로 평소에 돈 없어서 못 먹던 배달음식도 시켜 먹고 우리 집 싱크대랑 여러 가지 고장 난 곳 고쳤다. 그리고 맨날 같은 옷만 입고 다니다가 낡은 옷 싹 다 가져다가 버리고 탑텐이랑 이마트에서 새 옷 예쁜 걸로 거의 30만 원 넘게 샀고, 머리도 깔끔하게 했다.

 

진짜 자백 잘난 척이 절대 아니고, 하도 낡은 옷에 노숙자 머리 하고 다니다가 머리 깔끔하게 자르고 옷만 제대로 입고 다니니까 얼굴 못생겼어도 진짜 보기에 한결 낫더라 직장 잡은 후로 월급 180중에 부모님한테 생활비 30만원 드리고 50만원으로 나 식비 교통비 폰비 등등 내고 옷이나 기흉천식 약값 낸다. 그리고 나머지 100만원 다 저축한다. 친구도 없고 애인도없어서 쓸돈이 당장 없다 그래서 돈모으기는 좋다. 지금 통장에 200만원 넘게있는데 100만원 단위 이상의 숫자가 있어본게 살면서 처음이라서 너무 좋다.

반응형

공유하기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naver 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