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꾼 - 인생의 희노애락을 담다

쿠키 통에 담긴 5.18 광주의 진실

위르겐 힌츠페터 (Jürgen Hinzpeter)

(1937년 7월 6일 ~ 2016년 1월 25일)

5.18의 참상을 전 세계에 알린 독일 언론인 우리에겐 '푸른 눈의 목격자'로 알려진 위르겐 힌츠페터 씨가 별세했습니다.

그가 촬영한 5.18 광주의 모습으로 5.18은 '폭도들의 소요'가 아닌 '민주화 운동'으로 불릴 수 있게 했습니다.

철저히 통제되었던 광주에서 외국인이었던 그가 어떻게 들어가서 촬영을 하고 빠져나올 수 있었을까요??

그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고 합니다.

광주 5.18 촬영 비하인드 스토리

그는 1980년 5월 당시 독일의 제1공영 방송 'ARD TV' 소속 카메라 기자이자 도쿄 특파원이었습니다.

1980년 5월 19일 아침.

그는 한국 계엄령 선포 소식과 우연히 라디오에서 광주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상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죽고 한국이 민주화될 것으로 기대했는데, 왜 계엄령이 떨어졌을까?

한국에 연락을 해봐도 아무것도 알 수 없었습니다.

마침 그의 상사가 없어, 그가 보도 결정 책임자일 때, 광주행을 결정합니다.

광주로 가는 길은 쉽지 않았습니다.

고속도로에서 군인들에게 막혔고, 샛길을 통해 들어갔지만 이내 또 막혔습니다.

"길이 엇갈린 우리들의 부장을 찾으러 간다.

학생시위 때문에 잃어버렸다”

그는 거짓말로 겨우 광주로 진입할 수 있었습니다. "와주셔서 다행입니다. 환영합니다."

그가 광주 시내로 진입하니 군중들은 환호했습니다.

그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광주시내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20일에 도착한 그는 높은 건물 옥상에서 시내를 살펴봤고, 그곳에서 국제앰네스티 회원들을 만나 그동안의 참혹했던 일들을 듣게 됩니다.

*국제앰네스티 (모든 사람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활동하는 국제 인권단체)

독일 본사로 광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리려 했으나, 이미 전화선은 모두 끊긴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21일 새벽 4시경, 어디선가 들려온 총소리 그는 무슨 일인지,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아침이 되어 나가 보니 시민들이 몰려든 곳에는 건물 안에서 나온 시신 2구가 있었고, 밖에서 본 건물 유리창은 모두 깨져있었습니다.

시민 학살의 현장을 담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보니 더 많은 젊은이들이 죽어 있었습니다.

그가 당장 광주를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도청 앞에선 또 다른 사건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광주는 이제 저격 군들이 시민들을 조준 발포하는 모습, 구령에 맞춰 "앉아, 쏴”를 하는 모습마저 볼 수 있었습니다.

죽은 사람과, 피를 보는 것이 흔한 일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시위대는 건설 장비를 몰고 나오고, 총과 실탄을 구해 서로 나눴습니다.

그는 남은 필름을 모두 사용하면서 이를 촬영하기 시작합니다.

'언론인이 수집한 자료를 방송으로 내보내지 않고, 머릿속에만 넣으면 무슨 소용이 있나?'

이제 광주를 빠져나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자료가 워낙 방대해 가방 안에 둘 수 없었고, 군대에 발각되면 압수당할 것이 뻔했습니다. 그가 촬영한 필름 10롤 중 가장 중요한 5개는 허리 속에 넣었습니다.

광주에서 나오면서 두 번 검문을 받았지만, 군인들은 총기가 있는지만 살폈지 자료를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필름을 독일로 보내기 위해선 김포공항의 세관을 통과할 방법을 고민했습니다.

그는 공항의 엑스선 투시기를 통과하기 위해 필름을 알루미늄 호일에 싸고 그것을 결혼 케이크에 넣은 뒤 주석으로 된 큰 쿠키 통에 넣었습니다.

치열한 기자정신이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앞당겼다

한국의 광주와 그 주변지역까지 확대된 민중봉기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 필름은 일본에서 바로 독일로 보내져 그 날 저녁, 독일에 방송되기 시작합니다.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현장을 지켰던 치열한 기자정신이 국민의 양심을 깨워 이 땅의 민주화를 앞당겼다”

그는 2003년 송건호 언론상을 받았습니다.

내가 죽으면 한국에 묻어달라

그리고 그는 10여 년 전 광주를 방문해 “광주에 묻히고 싶다”는 뜻을 밝히며 손톱과 머리카락 등을 맡겨뒀습니다.

밀봉된 위르겐 힌츠페터 씨의 손톱과 머리카락, 그가 죽고 고인의 뜻대로 5·18 희생자들과 함께 망월동 묘역에 손톱과 머리카락을 안장하고 추모비를 건립할 것을 추진 중입니다.

1986년 서울 광화문 시위 현장에서 경찰에게 맞아 목과 척추에 중상을 입기도 하는 등 한국 민주주의의 현장에 늘 함께 했던 위르겐 힌츠페터 그는 생전에 한국 국민들에게 5.18을 절대 잊지 말아 달라 부탁했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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