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꾼 - 인생의 희노애락을 담다

마이크 타이슨

1966년 6월 30일 생 (55세)

미국의 복싱 선수. 1980~90년대 헤비급 복싱계 최고의 스타이다. 대중적인 인지도에서 만큼은 무하마드 알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복서로서는 최고의 인기와 유명세를 자랑한다. 특히나 전성기 시절의 임팩트는 최고 수준이라고 봐도 무방.

비록, 말년에 몰락이 급격히 찾아오긴 했지만 쌓아온 경력과 실력도 그 인지도에 충분히 걸맞는 수준이라 할 만하다. 프로 데뷔 후 무려 37연승에 19연속 KO. 괜히 센세이션을 일으킨 것이 아니다. 하지만 도핑을 한 점을 시인하고 자기관리에 실패하는 바람에 말년에는 선수로서나 사생활에서나 좋지 못한 모습을 보이는 등 복싱 전설로서의 대우만이 아니라 불명예스러운 평가도 받는 양면적인 복서이다.

#HELWANISHOW 타이슨 인터뷰

당신과 이소룡이 전성기 시절로 돌아가 서로 싸운다면, 이소룡을 이길 수 있는가?” 라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타이슨 또는 브루스리 중에 누가 이기냐?

그러자 타이슨 대답하길 "이소룡은 최고의 무술가이며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인물이지만 자신은 절대 이소룡에게 지지 않는다. 라고 쐐기를 박았습니다.


그 후 사회자는 "복싱이 아닌 무규칙 길거리싸움에서 격돌해도 결과는 같냐?" 라고 질문하자

 

타이슨은 길거리 싸움으로 하면 이소룡은 맞아 죽을 수 있다며 다시 한번 쇄기를 박았습니다. 이 방송을 본 중국인들은 극도로 대도 했습니다.

 

타이슨의 ng 때문에 죽을뻔한 견자단
타이슨 전성기 시절 경기력-1
타이슨 전성기 시절 경기력-2
타이슨 전성기 시절 경기력-3

웃긴 점은 이소룡은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미국인이라는 점이다.

이소룡 

1940년 11월 27일 생

이소룡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나 활동한 홍콩계 미국인 배우이다. 그는 절권도의 창시자이자 액션 영화의 패러다임을 바꾼, 액션 영화의 아이콘으로 평가받는다.

 

중국인 아버지인 유명 경극배우 이해천(李海泉)과 중국계+독일계 혼혈인[16] 어머니인 하애유(何愛瑜)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인 하애유가 홍콩의 4대 명문 가족 중 하나인 하동가족(何東家族)[17]의 자손 중 하나라고 한다. 명문가의 자손인 셈이다.

출생 이후 부모님의 고향인 홍콩에서 자랐다. 아버지 덕분에 이소룡도 매우 이른 나이에 데뷔했는데, 갓난아기 시절부터 영화에 나왔을 정도였고 아역배우로도 꾸준히 활동했다. 예명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소해천이라 하려고 했는데, 아버지 친구가 길을 지나다가 길거리 경극 공연에서, "…대룡이 소룡을 낳으니 곧 이어지는구나!"라는 대사를 듣고, 대룡이 이해천이라면 진번은 소룡이 어떻겠느냐고 권해서 지었다고 한다.

어릴 적에는 몸이 몹시 연약해서 잔병을 달고 살다시피 했으며, 7살 되던 무렵 신체 단련을 위해 태극권을 연마하는 것을 시작으로 무술에 입문하게 됐다. 이소룡의 아버지 이해천이 과거 홍가권(洪家拳)을 배웠던 영향도 있었다고 한다. 이소룡이 본격적으로 무술 수련을 시작하면서, 자신의 무술의 기본이 된 영춘권(詠春拳)을 엽문에게 배웠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엽문에게 배운 적이 있는 것은 맞지만, 사실상 이소룡에게 영춘권을 가르쳤던 이는 엽문의 제자인 황순량(黃淳樑)이었다. 그리고 이소룡을 영춘권에 입문시킨 사람은 황순량의 사제(師弟)인 장탁경(張卓慶)이었다. 황순량이 이소룡보다 5살 연상이었기에, 노사(老師)라기보다는 사형(師兄)에 가깝다 할 수 있었다. 그 외 같은 남권계열로 광동성의 유명한 권법이었던 채리불권(蔡李佛拳)을 익혔다. 원래 남권 유파들은 예부터 가족처럼 각별하게 지내던 풍속이 있던 분위기라서, 영춘권과 가까웠던 채리불권도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었다. 실제로 이소룡의 하단 공격기술들은 영춘권이 아니라 채리불권의 초식에 가깝다는 말도 있다.

다만 쿵후의 고수라는 그의 이미지와는 달리, 어렸을 때는 끈기가 없어 금방 싫증을 내곤 하여 한 무술을 오래 배운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하며 그나마 오래한 무술은 영춘권 정도였는데,13세에 영춘권에 입문했으니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까지 약 4년 배웠다. 근시라서 접근전에 유용한 무술을 찾다보니 영춘권을 택하게 되었다는 말도 있다.

어릴 때는 TV 등에서 아역으로 얼굴을 알리기도 해서 인기도 있었지만 학교에서는 골목대장에 가까웠고,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부모조차도 어떻게 손을 써볼 수 없는 불량학생이며, 매일같이 다른 학교 학생들과 패싸움을 벌였다고 한다. 당연히 공부는 뒷전이었지만, 춤에도 일가견이 있어 당시 유행하던 차차차 댄스 콘테스트에서 일등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싸움질은 더욱 심해졌고, 삼합회 간부의 아들과 싸움을 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리고 집에 경찰이 찾아와서, “한 번만 더 당신 아들이 싸움을 벌인다면, 녀석을 감옥에 처넣을 겁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1959년 4월, 부모는 이소룡에게 100달러를 쥐어주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이해천의 누나, 이추봉(李秋鳳, Agnes Lee)에게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미국으로 보낸 것엔, 미국은 속지주의(屬地主義)이기에, 미국에서 태어난 이소룡은 미국 시민권이 있었던 점도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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