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꾼 - 인생의 희노애락을 담다

이순신 제거를 위한 음

이순신 제거를 위해 이중간첩을 보낸 일본

가토 기요마사의 이동 경로를 알려준 이중간첩

일본군의 정보를 믿고 이순신에게 출병 명령을 내린 선조

이순신 제거를 위한 일본군의 거짓 정보를 믿은 선조

일본군의 음모를 간파했던 이순신

선조의 출병 명령을 거부한 이순신

 

허위 정보를 꿰뚫어 본 이순신 일본의 계략에 말려든 선조

이순신에게 명령 불복종의 책임을 물은 선조

"이순신은 용서할 수가 없다. 무장으로서 어찌 조정을 경멸하는 마음을 갖는가"

선조실록 107년 1월 27일

조정의 대신들의 이순신 비난에 홀로 이순신을 변호한 우의정 정탁

"이순신은 조용한 사람인 듯한데, 다만 속임수가 많고 전진하지 않고 있습니다"

선조실록 1597년 1월 27일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도 이순신을 변호한 우의정 정탁

“위급할 때에 장수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논리가 어느 정도 절충이 돼서 이순신이 그나마 최악의 상황만은 면하고 백의종군을 하게 되는 거죠

사형을 면하고 삭탈관직되어 백의종군

백의종군 "흰 옷을 입고 군대에 복무함. 즉 벼슬 이 없는 말단 군인으로 전쟁터에 나가 참전함"

 

이 무렵 난중일기를 보면

"더해지는 슬픈 마음을 이길 길이 없다"

난중일기 1597년 4월 1일

 

"다만 어서 죽기를 기다릴 뿐이다"

난중일기 1597년 4월 16일

 

충성의 대가가 버림받는 겁니다...

이순신의 고독한 심정을 엿볼 수 있는 대목

이순신 장군 대신 삼도 수군통제사로 임명된 원균

원균의 조선수군 칠천량에서 참패 후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이순신

조선 수군의 배 160여 척파 1만여 명 전사자 발생

육지로 피했던 원균도 사망

칠천량 해전으로 조선 수군 궤멸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이순신

칠천량 해전 패전 후 남은 전투선은 13척에 불과

1598년 9월 16일 서해를 통해 곧장 한양으로 진격하려던 일본 함대가 명량해협에 당도

명량해협에 다다른 일본군 함대

 

일본군의 전투선 133 VS 이순신의 판옥선 13척

일본군, 조선 수군의 공격에 퇴각

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을 승전

명량해전鳴梁海戰

명량해전 승리에 대한 선조의 반응

선조日" 사소한 왜적 잡는 거 당연히 장군의 직분 아닌가?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이다.”

통제사 이순신이 사소한 왜적을 잡은 것은 '바로 그의 직분에 마땅한 일이며 큰 공이 있는 것도 아니다.'

선조실록 1597년 10월 20일

 

그래서 당시 이순신 장군 품계를 올려주자 라는 이런 주장에 대해서도 지나치다. 라며 이순신 장군을 시기

이순신에 대하여는 참으로 포상할 만한 일이지만, 품계를 올려주는 것은 좀 지나친 듯하다

선조실록 1508년 4월 15일

 

사소한 왜적 때문에 몽진(피난)까지 한 선조..

그럼 사소한 왜적 때문에 몽진까지 했다...??

명나라에서 인정한 이순신 공로

아랫사람의 공을 하찮게 여기는 건 리더로서의 자질 부족

오히려 명나라에서 인정한 이순신의 공로

 

명나라군 경리 양호는 이순신에게 비단까지 선물

선조가 이순신의 공을 깎아내린 건 자국의 위신을 스스로 깎아내리는 일

 

1598년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일본군, 조선에서 철군 결정

일본군의 퇴로를 가로막은 이순신과 조선 수군

 

노량해협에서 격돌한 조명 연합수군과 일본 수군

조명 연합수군의 공격에 퇴각하는 일본 수군

전투 중 일본군 총탄에 맞은 이순신 장군 사망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이순신 장군의 죽음에 대해 선조는 어떤 반응을 보였나?

 

이순신 장군에 대해서는 계속 일관된 모습을 보임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마치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 이 "오늘 밤은 늦었으니 비변사에서 알아서 처리해라"

선조실록 1598년 11월 28일

 

조선의 운명을 살려내고 돌아 분인데...

선조에게 이순신의 죽음은 남의 일이었던 것

선조 때는 인정받지 못했던 이순신 장군

충무공 시호를 받은 건 인조 21년

충무공이라는 시호도 돌아가신 지 45년 후인 인조 때 시호를 받음

 

이순신을 높이 평가했던 정조

이순신을 영의정으로 추존

 

선조는 전투에 임했던 무신들을 어떻게 대우했나?

 

선조는 전쟁이 끝난 후 104 명의 공신을 책봉

전쟁에 참여했던 공신을 선무공신이라고 하는데 18명을 책봉

 

선무공신

임진왜란 때 무공을 세운 18명의 신하에게 내린 칭호

 

그중에 일등공신은 단세명뿐

권율, 이순신, 원균 세 명뿐

 

그렇게 미워하더니 그래도 일등공신에 인정은 해주네요

누가 뭐라고 해도 정말 큰 공을 세웠기 때문에 일등공신에 임명 은 했는데,

선조조차도 일등공신에 책봉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순신

문제는 원균이 같이 들어가면서 뭔가 일등공신도 물 타기 한 거 같은..

 

또 이 선무공신 지정에서 주목할 것은 곽재우라던가 이런 의병장들이 대부분 빠졌다는

선무공신에 책봉되지 못한 대부분의 의병장들

 

선조의 공신 책봉은 독립운동가 처우와도 비슷

 

선무공신을 제외한 나머지 공신은 어떤 공을 신을 사람들인가?

나머지 86명은 호성공신

선조가 의주로 피난 갈 때 호위한 신하들

후안무치한 선조

선조는 전란극복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명나라군이라고 생각

선조실록에 보면은 선조가 공신을 정하면서 어떤 말을 하냐면

 

이번 왜란의 적을 평정한 것은 오로지 명나라군의 힘이었고

"우리 장수들은 명나라군대의 뒤를 따르거나 혹은 요행히 잔적의 머리를 얻었을 뿐으로

일찍이 제 힘으로는 한 명의 적병을 베거나 하나의 적진을 함락하지 못하였다."

선조실록 1001년 3월 14일

 

이게 무슨말이냐면 즉 선조는 명에 게 원병 요청한것이 가장큰 공이라 고 생각

선조에게 가장 큰 공은 명나라에 원병을 요청한 것

선조에게 가장 큰 공을 세운 것은 자신을 호위한 신하들

선조의 그러한 생각이 바로 공신책봉에서 나타는것 같음

 

왕의 자는 구할 줄 알았지만 나는 구할 줄 몰랐던 왕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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