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꾼 - 인생의 희노애락을 담다

화가 났을 때 여친은 얼굴의 근육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눈빛으로 모든 감정을 쏟아 내는 여자거든요.

 

어찌 보면 무표정한 그 얼굴에 오로지 살아 있는 것은 검은 눈동자 뿐…

 

어둑어둑한 복도의 센서등 아래에서 활활 타오르는 분노의 눈빛으로 저를 노려보고 있는

 

여친의 눈빛에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습니다.

 

 

 

‘ 대체 어떻게 알고 온거지? ‘

 

‘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거지? ‘

 

‘ 하루종일 따라 다닌건가? ‘

 

‘ 그렇다면 이제 어떡해야 하는거지? 뭐라고 말을 하지? ㅊㅈ 는 이 상황을 어떻게 대응할까.. ‘

 

‘ 아니, 여친에게 붙잡혀 있는 ㅊㅈ 를 어떻게 갈라 놓지? 그리고 둘 중 누굴 보내야하지? ‘

 

 

마치 죽음의 벼랑 끝에 서 있는 사람처럼 짧은 순간에 수십, 수백가지의 생각이 머릿 속에 꽉 들어차서 회오리를 일으킵니다.

 

생각은 많은데 결정은 하나도 내릴 수 없는 극단적 패닉의 상태.

 

 

 

 

이럴때일수록 판단은 빨라야 했습니다.

 

결정을 내리기 전에 행동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죠.

 

무슨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무조건 내가 그들 사이를 떼어 놓고 둘 중 누가되든 대화를 해야 한다는 것을.

 

ㅊㅈ 와 여친에게 걸어가는 5미터짜리 시간동안 신기하리만치 모든 것이 정리되어감을 느꼈습니다.

 

 

 

 

감정을 담지 않은 채 낮은 목소리로 “ 여전하구나 너? 패턴이 하나도 변한게 없어. “

 

매섭게 노려보며 여친이 입을 엽니다. “ 너 나한테 이러면 안돼. “

 

“ 팔 아파. 얘보고 내 손 놓으라고 해줘. “ ㅊㅈ 가 날 바라보며 말을 합니다.

 

집 열쇠를 주며 “ 집에 먼저 들어가 있어. 문잠그고.  내가 전화하면 열어. “

 

 

 

ㅊㅈ 에게 열쇠를 건네주는 찰나 여친이 순식간에 열쇠를 가로채며 내 방문으로 달려 갑니다.

 

저도 반사적으로 여친의 뒤를 쫓아 달려가 문을 열려는 그녀의 손을 낚아 채고

 

“ 뭐하자고? “

 

 

ㅊㅈ 가 또 떠날까봐 걱정이 됩니다.

 

성격상 구질구질 한 상황을 보면 일순간 정을 털어내고 떠날만한 ㅊㅈ 이기에 또 한번의 이런 상황을 겪은 이상

 

몇 개월간의 나와의 좋은 기억과 감정이 쌓여 있다 하더라도 미련없이 떠나버릴 사람인걸 알기에 더더욱 걱정이 됩니다.

 

‘ 아………….. 모든게 끝났어…. 이제 둘 다 모두 날 떠날꺼야… 난 좀 더 빨리 둘 중 한 명을 선택했어야 했어…

 

그리고 여친과 아름답게 이별했었어야 했어………..’

 

 

 

ㅊㅈ 도 어느새 따라와 한마디 합니다.

 

“ 문 열어줘. 나 들어가서 기다릴래. 오래 걸리면 나 갈꺼니까 빨리 끝내고 와. “

 

“ 뭐.. 뭐라고? 너가 뭔데? “

 

“ 이러지 말고 나가서 얘기 하자. “

 

“ 너 나한테 이러면 안돼. 안된다고!!!! “

 

 

 

밀고 당기기를 수차례 하다가 결국 완력으로 여친을 붙잡고 벽으로 몰아 세웁니다.

 

“ 어서 들어가! 문 어서 잠궈! “

 

 

 

현관의 자물쇠가 철커덩 하고 잠기는 소리에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여친이 주저 앉으며 흐느낍니다.

 

“ 너…. 나한테 이러면 안돼…………이러면 정말 안돼…….. 나한테 이러지마………………….”

 

 

 

 

 

 

 

 

침묵…

 

 

 

 

 

 

 

가슴속에서, 머릿속에서 또 다른 내가 나에게 타이릅니다.

 

‘ 지금이라도 아무일 없던 시절로 돌아가. 지금이라도 늦지는 않았을거야. 너가 상황을 돌이킬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야. 어서 미안하다고 해. ‘

 

어려운 나날동안 늘 곁에서 나를 일으켜 세워줬던 그녀. 재수를 하던 때에도 언제나 나에게 힘이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주었던 여친.

 

단지, 그 정성만큼이나 치열했던 의심과 질투에 힘겨워 했던 나.

 

과연 내가 언제까지 그녀의 집착을 견뎌낼 수 있을까… 이제라도 정리 해야만 한다.

 

난 4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단 한번도 한 눈을 판 적이 없었다.

 

날 이렇게 만든 건 너야……. 너밖에 없었던 날, 너만 바라보던 날 다른 곳을 바라보게 만든 건, 날 지치게 만든건 바로 너였어.

 

 

 

 

 

“ 에이 걱정할꺼 하나도 없대도? 진짜 겁먹었나봐 ㅎㅎ “

 

“ 너가 보기엔 내가 진짜 여자 많이 만나본거 같지? 나 의외로 안그럼 사람이거든? 여친 부모님한테 인사 드리러 가는거 이번이 처음이라니까 진짜 안믿네. “

 

“ 우리 엄마아빠는 무슨 괴물이야? 그냥 사람이라니까. 그냥 아빠가 말이 원체 없는 분이라서 그렇지 안무서워 ㅋㅋ “

 

옷매무새를 고치며 “ 근데 이렇게 입어도 괜찮나? 정장 입어야 하는거 아냐? “

 

 

 

청바지에 언더우드 체크남방을 입고 있는 내 모습이 너무 불량(?) 해 보였습니다.

 

“ 아유 아저씨~선보러 가세요? 20대초반이 그럼 무슨 상견례도 아니고 정장을 입고 여친 집에 놀러가냐고.ㅋㅋ “

 

“ 나 담배 냄새 안나지? “

 

내 가슴 깊숙이 얼굴을 파묻더니 “ 응 안나. 오늘 하루만 금연! “ 나를 올려다 보며 말하는 여친..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여친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 엄마 나 왔어. “ 현관 앞에서 신발도 벗지 못하고 쭈뼛대는 나를 향해 뒤돌아 보며 “ 모해? 신발 벗어. “

 

“ 오셨어요? “

 

“ 예? 예 안녕하십니까. 따옥이 친구 치토스라고 합니다. “

 

“ 밥은 먹었고? “

 

“ 네 먹고 왔습니다. “

 

“ ㅋㅋ 엄마 우리 아무것도 안먹었어. 얘가 지금 굉장히 겁먹었거든? 아빠는? “

 

 

 

그녀의 아버지는 돌부처 같은 분이었습니다.

 

그날 제가 들었던 아버지의 말씀은 “ 왔냐. “ 가 전부였습니다.

 

그렇게 첫인사를 드린 이후 한달에 두 세번씩 여친의 집에 놀러를 갔습니다.

 

어느날 그녀의 아버지께서 나를 좀 봐야겠다며 집으로 오라고 하셔서 찾아뵈었더니

 

 

 

“ 따옥이가 널 많이 좋아하더라. 애미 통해서 얘기 많이 들었는데 일하면서 공부하느라 힘들다면서? “

 

가정형편이 넉넉한 편이 아니라 주말알바를 하고 있었는데 그걸 아셨나 봅니다.

 

“ 주말에 우리가게에 와서 애비 일 좀 도와라. “

 

주유소를 하고 계신 아버지의 어명에 그저 고개만 숙이고 “ 알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 라고 할 수 밖에요.

 

 

 

 

여친에게 나는 두 번째 남자였습니다.

 

딱 한번 나를 만나기 전에 만났던 첫사랑은 고딩시절 짝사랑하던 동네오빠였는데 사귀는 여자가 있으면서 제 여친이 자길 좋아한다는걸 이용해서 양다리를 심하게 걸쳤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여친은 상처를 심하게 입고 그 영향으로 늘 저를 의심하고 집착했었죠.

 

남자로써의 첫남자는 제가 처음이었습니다…

 

 

 

 

 

 

 

“ 일단 조용한데 가서 얘기하자. 어차피 여기서 얘기 해봤자 답 안나와. “

 

한겨울의 매서운 바람이 현관을 타고 복도로 들어오더군요.

 

술취한 새처럼 복도 바닥에 주저앉은 여친을 일으켜 세워 밖으로 나왔습니다.

 

깜깜한 하늘에 구름이 꽉 차서 별조차 보이지 않는 암흑의 거리로 위태로운 연인이 걸어갑니다.

 

 

 

 

 

꼬옥..

 

 

 

여친이 제 팔짱을 낍니다.

 

가슴 속에서 망치가 온 사방을 휘돌며 제 양심을 두들기는 듯 했습니다.

 

두꺼운 옷을 입었는데도 피가 통하지 않을만큼 꼭 잡은 팔짱…

 

아무 말도 없이 손님이 드문 조용한 커피숍으로 들어갔습니다.

 

‘ 냉정해지자… 이미 갈데까지 가버렸어…. 더 이상 좋아진다는건 불가능해. 어차피 끝낼거라면 냉정하게 끝내자…. 그래야 덜 아플꺼야.. ‘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눈을 치켜 뜬 채로 “ 너 참 징하다. 아주 반복적이고. 그렇게 의심하고 살면 행복하디? “

 

 

고개를 숙인 채 머리를 가로저으며 “ 아냐아냐…… 안행복해…. 이제 안그럴께………나한테 이러지 마…… 따뜻하게 말해줘…….. “

 

 

“ 나 이미 마음 정리 다 됐어. 나도 미안하긴 하지만 너 만나면서 나 한눈 판적 없는거 알지? 너의 그 집착이 오히려 이렇게 이끌었어. 다 너 책임이야. 너가 나에게 그러지 않았으면 오히려 우린 잘 됐을꺼야. “

 

 

“ 잠깐! 얘기 다 들어줄 테니까 끝내잔 말만 하지마. “

 

 

“ 아니? 난 이미 끝났어. 끝난지 오래됐고 말로만 오늘 끝내는 것 뿐야. 훨씬 오래전에 끝났었어. 할 말 다 한거같으니까 갈께. 추우니까 따라오지마. 어차피 문 안열어줄꺼야. 아니 딴데로 갈꺼야. 집에 아무도 없을거야. 집앞에서 기다려봤자 소용없어. “

 

“ 제발!!!!!!!!!! 나한테 이러면 안돼……….가지마…. 나한테 이러지 마.. 너 안그런 애잖아……… “

 

 

여친 앞에 놓인 물잔을 가리키며 “ 화나면 그거라도 나한테 던져. 맞아줄께. 그걸로 끝내자. “

 

 

 

 

여친을 홀로 커피숍에 내버려 둔 채 빠른 걸음으로 집으로 걸어갔습니다.

 

“ 왜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해? “

 

아무 대꾸도 없이 벽에 붙여 놓은 여친과의 사진을 다 떼어 가방에 담고

 

“ 나가자. 오늘 여기 있으면 안될 것 같다. 너네 집으로 가자. “

 

 

ㅊㅈ 의 집 옥상으로 올라가 여친과의 사진을 모두 태워 버렸습니다.

 

만 3년간의 추억이 재가 되어, 연기가 되어 구름이 되어 허공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사진을 모두 태우고 방으로 돌아온 나는 ㅊㅈ 에게 “ 난 모든걸 버렸는데 넌? “

 

ㅊㅈ 도 제가 무슨 얘길 하고 싶어하는지, 무슨 대답을 듣고 싶어하는지 압니다.

 

진지해지기를 무척이나 싫어하는 ㅊㅈ 였지만 오늘만큼은 평소의 앙증맞고 장난끼많은 표정을 읽을 수 없었습니다.

 

ㅊㅈ 가 서랍 속에서 다이어리 하나를 꺼냅니다.

 

 

 

“ 치토스 ♡ 썬 “

 

우리가 만나온 3개월 간의 모든 이야기를 담은 기록. 일기.

 

초등학교 앞 문방구에서나 구할 수 있을 법한 유치찬란한 스티커에 종류도 헤아리기 힘들만큼 다양한 편지지를 붙여서 만든 100여장의 다이어리.

 

 

 

 

그런거 보셨나요?

 

숨이 막힐듯한 이쁜 여자의 글씨.

 

단 한 장도 그냥 다이어리에 적은게 없고 한 장 한 장 모두 아기자기한 편지지에 색연필과 스티커, 사진으로 정성들여 꾸민 나와의 데이트 다이어리.

 

 

 

“ 그럼… 유학 간 남친은 어떡할거야? “

 

“ 걔 의대다녀. “

 

“ 2년 후에 들어온댔자나. “

 

“ 잠깐 들어온단거지… 2년동안 한국에 한번도 안들어오기로 하고 간거야. 거기서 계속 공부하고 취업하고 그럴 계획으로 간거고 나도 졸업하면 유학가서 만나기로 한거거든. “

 

“ 그럼 유학 안가려고? “

 

“ 너 하는거 봐서~ “

 

웅…………….

 

 

핸드폰이 울립니다.

 

“ 나 집에 가. 걱정하지마. 집에 가서 따뜻한 이불 덮고 코 잘꺼야. 그러니까 걱정 안해도 돼. 끝이라고만 하지마.. 사랑해.. “

 

 

“ 나 담배 한 대 피우고 올께. “

 

잠바를 들고 일어서려는데 썬이 저를 붙잡습니다.

 

“ 여기서 피워. 오늘부터 내 앞에서 담배 피워도 돼. “

 

“ 너 담배연기 싫어하잖아. “

 

 

썬은 저와 코코스나 TGI를 가도 늘 금연석을 고집했습니다. 담배 연기를 너무 싫어한 그녀는 자길 만나는 동안 제가 담배 피우는 꼴을 못봤거든요.

 

몰래 한대라도 피우면 그길로 내 담배를 통째로 쓰레기 통에 버렸었던…

 

“ 나 실은 너 몸에서 나는 담배냄새 좋았어. 보여주까? “

 

“ 뭘 보여준다고 그래? “

 

다이어리.

 

< 그이한테서 나는 담배 향기(?)가 너무 좋다. 직접 맡는 연기는 싫은데 그 사람에게서 나는 담배 향은 너무 사랑스럽다. >

 

 

“ 이제 나랑 떨어지지 마. 그 즉시 사망이야. “

 

“ 그 대신. 나도 하나만 부탁할께. “

 

“ 모? “

 

“ 소주는 소주잔에 마시자. 힘겹다 쫌… “

 

“ 싫어. 대신 조금 마실께 ㅋㅋ “

 

 

 

 

 

봄이 오고 새 학기가 시작 되었습니다.

 

이제 전여친의 기억도 가물가물 해지고 썬과의 사랑은 깊어만 갑니다.

 

“ 나 오늘 친구들이랑 쇼핑가는데 어쩌면 전화 잘 안될지도 몰라. “

 

“ 쇼핑가는거랑 전화 안되는거랑 무슨 상관인데? “

 

“ 나 쇼핑하면 완전 집중모드잖아. 그래서 몰라서 못받을지도 모른다고. “

 

“ 응.. 알았어.. “

 

 

 

또 하나의 시련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4개월 전>

저와 썬은 서약서를 작성 했습니다.

둘이 방바닥에 나란히 배 깔고 엎드려서는 “ 이거 재미있기는 한데 말야. 진짜 지키는거 맞지?"

“ 그럼 안지킬꺼면서 왜 쓰니? 근데 너가 쫌 어렵긴 할꺼야 ㅋㅋㅋ ”

 

“ 뭔말이냐… 내가 왜 더 어려운건데?! “

 

“ 난 여자니까~ “

 

“ 아 네 재수없으세요 아주 그냥요. “

 

1.        절대 바람 피우지 않는다.

- 걸리는 즉시 사망.

2.        나만 이쁘다고 해주기.

3.        하루에 10번이상 사랑한다고 말해주기

4.        공부를 해도 돈을 벌어도 나랑 잘되기 위해서 악착같이 하기

5.        나보다 돈 더 많이 벌어서 내가 먹고 싶은거 하고 싶은거 다 해줄 수 있는 능력자 되기

6.        2년 후에 유학간 남친 돌아올 때까지는 절대 사귀는거 비밀로 하기

- 그 남친한테만 비밀로 하고 다른 주변사람들에게는 해당사항 없음.

 

썬이 저에게 준 서약에서 사인과 도장을 찍었습니다.

 

제가 써 준 서약서는 간단했죠.

 

 

1.        절대 바람 피우지 않는다.

2.        2년 후에는 확실히 정리한다.

- 그 남자

3.        뜨겁게 사랑하기

 

 

유학 가 있는 남친은 어차피 얼굴도 보기 힘든 사람인만큼 굳이 지금 헤어지자고 해서

 

별안간 한국에 들어 올 수도 있기 때문에 험한 꼴 보지 말자는 차원에서 썬의 제의를 수락했습니다.

 

과연 헤어지잔다고 한국에 들어올만큼 야망이 작은 남자는 아닐텐데 라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만에 하나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이미 두 번의 사건을 겪은 썬과 나로써는 안전제일을 추구할 수 밖에 없었던거죠.

 

 

 

 

 

 

 

 

과 동기들과 자취방에서 거나하게 술판을 벌인 어느날.( 썬이 쇼핑하러 간 날)

 

동기들을 다 보내고 흐트러진 방을 치우다가 문득 발견한 따오기의 머리핀.

 

‘ 따오기를 만나면서 큐빅이란게 세상에 존재한다는 걸 알았었는데.. ‘

 

그러고 보니까 여자에 대한 모든 것들은 따오기를 통해서 배웠던 것 같네요.

 

항상 헬쓱 한 지갑 때문에 변변한 선물 하나 못해줬던 내가 처음으로 사줬던

 

큐빅이 조잡하게 박혀있는 머리핀.

 

3,000원 밖에 하지 않던 싸구려 머리핀을 수리까지 해가며 하고 다녔던 따오기가 갑자기 보고 싶어졌습니다.

 

 

 

 

이러면 안되는 줄 알면서도 그녀의 폰번호로 손이 가네요.

 

번호를 잊었는데, 신기할만큼 몇 개월만에 완벽하게 잊어버린 전화번호인데 손가락이 기억을 하고 있더군요.

 

 

신호음.

 

 

 

“ 여보세요? “

 

침묵…

 

 

내가 전활 했다는 걸 직감으로 느끼는 듯 한 따오기의 음성이 수화기 너머로 들려옵니다.

 

“ 전화…. 왜 한거야? “

 

“ 잘 지내고 있지? “

 

밝은 목소리로 “ 잘 지내지~ 넌 어때? 그 여자애랑 아직도 사겨? “

 

아무렇지 않은듯 썬과의 관계를 물어오는 따오기. ‘ 과연 무슨 생각일까. 아직도 날 잊지 않고 있을까.

 

아니면 다 잊고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을까. 물어볼까. ‘

 

 

 

 

“ 우린 잘 지내고 있지. 우..린… “

 

“ 우린? 너 안부 물은건데 참 잔인하다.. 기분좋게 통화하고 싶었는데… “

 

“ 아.. 미안…….. 그냥 실수였어. 잘 지내… “

 

 

 

 

뚝.

 

 

 

 

 

전화를 끊고 머리핀을 만지작거리며 바보처럼 되뇌였습니다.

 

 

“ 미. 안. 해.    미안했었어. “

 

 

그 말이 그렇게 하고 싶었습니다.

 

이미 다 지난 일이었지만 미안하단 말 한마디 못한게 늘 가슴 속에 응어리가 져서,

 

그 말 한마디라도 하지 않으면 썬과의 진정한 사랑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이라는 나만의 집착.

 

그 말을 못하고 끊은게 후회돼서 다시 전화를 겁니다.

 

 

 

 

전화를 안받는군요.

 

 

 

“ 그 땐 많이 아팠는데 일주일 지나니까 괜찮아졌어.

 

지금도 그렇고. 엄마아빠는 너 죽은걸로 알아.

 

내가 죽었다고 했거든. 하도 울고불고 밥도 안먹고 그러니까 너랑 헤어졌냐고…

 

그래서 그냥 너 죽어서 이런거라고 했어. 잘 지내고 집으로는 전화하면 안돼..

 

그리고 나한테도…..

 

사랑했었어. “

 

 

 

 

 

전공서적이 빼곡하게 꽂혀 있는 책장 깊숙한 곳에 머리핀을 집어 넣었습니다.

 

버려야 하는데, 예민한 썬은 언제든 이걸 찾아낼 수도 있는 여자인데도 마지막 남은

 

따오기의 기억을 모두 버리기엔 아직 미련인지… 애증인지.. 뭔가가 남아 있었나 봅니다.

 

 

 

 

 

낮에 한번 썬에게 전화를 걸었었는데 받지를 않았었습니다.

 

밤 11시가 넘어 이제야 생각이 나서 썬에게 전화를 겁니다.

 

 

“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어서 음성사서함으로 연결 됩니다…. “

 

 

 

다시 겁니다.

 

 

 

따오기와의 추억까지 겹쳐서인지 머릿 속에서 웬지 모를 불안감이 중첩되고

 

 

이 불안감은 썬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집니다.

 

 

순식간에 난 미친놈이 되어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가기 직전까지 수십번의 전화를 걸어버립니다.

 

그렇게 수십, 수백의 전화를 거는 동안 시계바늘은 어느덧 새벽 2시를 가리키고…

 

 

 

 

“ 여보세요? “

 

“ 왜 전화 안받았어? 내가 몇 번을 전화를 했……. 뚝 “

 

다시 겁니다.

 

“ 뭐하자는 거야? 너 쇼핑간건 맞아? 지금까지 쇼핑한다곤 못하겠지? 뭐야? “

 

“ 내일 통화해. “

 

차가운 썬의 음성.

 

“ 난 지금 통화해야겠거든? “

 

“ 내일 아침에 내가 전화 걸께. 끊어. “

 

“ 잠깐만! 이렇게 끊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끊는거야? “

 

차마 끝이란 얘기는 두려워서 못하고 암시만 줍니다.

 

“ 알겠어. 끊어. “

 

 

‘ 허…… 이렇게 냉정하다니…………. 오늘 아침까지도 상냥했던 썬이었는데……대체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난거지… ‘

 

 

다시 전화를 걸면 내가 얼마나 초라한 남자가 되는 것인지 뻔히 알면서도

 

전화번호를 누르는 내 손가락이 미치도록 밉습니다.

 

 

 

다시 꺼져 있는 썬의 전화기.

 

 

 

 

 

 

택시를 타고 그녀의 동네로 갔습니다.

 

아까 분명 통화할 때 술집 분위기 같은 소음이 들렸기 때문에 학교 앞 모든 술집을 샅샅이 뒤져 보기로 했습니다.

 

한 시간을 그렇게 돌아다녔을까.

 

썬과 두어번 같이 갔었던 호프집에 다달아서 문을 열고 들어가니.

 

창가쪽 테이블에 썬의 뒷모습이 보입니다.

 

 

‘ 나의 그녀. 썬. “

 

마주 앉은 남자는 누굴까.

 

직감으로 느꼈습니다.

 

 

 

 

 

 

유학간 남친.

 

 

나에겐 둘도 없이 나쁜 남자인데, 왜 이렇게 그 남자가 불쌍해 보일까요.

 

선하고 착한 사람이라는게 눈빛에서부터 느껴졌습니다. 너무나 착해 보였습니다.

 

있는 집 남자일텐데, 그것만으로도 혈기왕성한 20대 초반의 나에겐 바보 같은 열등감에

 

주먹이 올라가야 정상일텐데… 이 기분은 뭘까.

 

 

 

 

동병상련이었습니다.

 

지금 내가 느끼는 가슴의 고통을 저 남자도 함께 겪고 있는 사랑 앞에 나약한 남자일 뿐이라고.

 

둘 앞으로 다가가 섰습니다.

 

 

소스라치게 놀라는 썬 “ 어맛! 너 여기 어떻게 찾아왔어? “

 

썬을 외면하고 남자에게 말을 건냅니다.

 

“ 안녕하세요. 처음 뵙네요. “

 

놀라는 남자에게 “ 싸우려고 온거 아니예요. 언젠가 저도 한번은 보고 싶었는데 시기가 좀 빨랐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

 

“ 그만 하고 일단 집에 가있어. 내가 내일 전화한다고 했잖아 자기야… “

 

“ 너가 걱정하는 상황 없을거야. 다만 연락이 안되서 걱정되서 왔던거고… 집착… 집착이라고 생각하지만 말아줘. 그건 못견디겠어. “

 

 

 

 

 

썬은 나와의 서약을 어겼습니다.

 

 

첫 째. 한눈 팔지 않기로 한 것.

 

둘 째. 2년동안 기다리라고 한 것.

 

 

 

 

엄밀히 따지면 썬은 하나 밖에 안어긴게 되겠군요.

 

썬은 시간이 흐를수록 저에 대한 사랑이 깊어져 갔고, 2년 동안 사랑하는 남자에게

 

바보 같은 서약을 지키고 기다려 달라고 하기엔 자기의 욕심이 과하단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2년이 아닌 몇 개월만에 유학 간 남친에게 이별을 통보했고, 그 남친은 이별얘기에 놀라 급거 귀국.

 

그녀를 만났던 것이었죠.

 

 

 

남자가 저에게 부탁을 합니다.

 

“ 치토스씨. 누구보다 썬을 사랑하시겠지만.. 저는 썬이 절실해요. 정말 썬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부탁드릴께요.. “

 

 

 

 

절실……… 필요………..

 

 

 

나는 나를 그토록 사랑하고 집착하는 불쌍한 여자를 차가운 겨울 속에 버리고 썬에게 왔노라고..

 

난 이제 썬과 헤어지면 그 누구와도 사랑할 자격이 없는 남자가 되는거라고..

 

썬과의 사랑을 완성하지 않으면 나로인해 깊게 베인 가슴을 안고 평생을 살아가야 할 한 여자에게

 

또 다시 배신을 하게 되는거라고…

 

 

 

난 그래서 당신과는 이유가 다를지는 몰라고 그 절실함 만큼은 당신 못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고…

 

 

 

 

 

사랑과 이별이라는 것은 말이죠.

 

<집착하고 매달리는 자에게는 선택권이 없습니다.>

 

선택은 그저 사랑받고 있는 자의 특권입니다.

 

 

 

두 남자는 썬의 결심을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 그 누구도 썬을 스치지도 않고 오로지 혼자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었습니다.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정을 바라보고 상념에 빠져든 나..

 

창밖으로 차가 주차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또각또각또각.

 

 

 

 

찰칵.

 

 

 

방문이 열리고 그녀가 들어옵니다.

 

한 손에 소주를 든 채.

 

 

 

 

미동도 하지 않고 누운 채 그녀를 바라보는 나.

 

 

 

 

 

‘ 나가! ‘

 

 

 

 

 

자존심 때문에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할뻔 했습니다.

 

 

 

맥주잔에 소주를 가득 따라 입에 물고는 나에게 다가오는 썬.

 

 

 

무릎을 꿇고 허리를 숙여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술을 머금은 입술을 그대로 나의 입술에 포개입니다.

 

 

 

쓰디쓴 소주의 향이 코를 자극하고, 입 속으로 그녀가 나눠주는 쓰디쓰면서도 달콤하고 소중한 액체가 들어옵니다.

 

 

 

둘이 거의 동시에 술을 삼키고, 한참을 서로의 눈빛만 바라보며…. 그녀는 무릎 꿇은 채로, 난 누운 채로 눈물을 쏟아 냅니다.

 

 

 

그녀의 볼을 타고 흐른 눈물이 방울이 되어 내 콧잔등으로 떨어집니다.

 

 

 

 

 

다시 입술 위로 떨어집니다.

 

 

 

 

 

그녀의 눈물과 나의 눈물이 서로 섞여 더욱 더 깊은 슬픔의 호수를 채워갑니다.

 

 

 

그녀의 팔을 당겨 침대 위로 올립니다.

 

 

 

 

 

‘ 이게 마지막이겠지…….. ’

 

 

 

 

이젠 우린 오늘 밤을 끝으로 다시는 볼 수 없는거겠지.

 

 

 

“ 울지마 바보야….. 내가 오늘 너 눈물 다 먹어줄껀데 너무 많이 울면 나 똥배 나오잖아…. “

 

 

 

썬이 나의 볼을 손으로 닦아주며 다시 입술을 덮습니다.

 

 

나의 모든 눈물을 마시겠다며, 나의 모든 체취를 가져 가겠다며

 

 

그렇게 그녀와 나는 지독한 슬픔을 격정의 몸짓으로 씻어갑니다.

 

 

그녀와 내가 흘리는 눈물은 배게를 적시고 우리의 몸짓은 서로의 가슴을 적십니다..

 

 

 

 

 

 

격렬한 몸짓이 끝나고 난 후.

 

 

 

 

그녀가 들어올 때 입었던 모습 그대로 다시.. 그 모습 그대로 다시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 몸이 하나듯 마음도 하나일꺼야. 단지 더 필요한 사람에게 몸만 가는거야…

 

 

죽을 때까지 사랑할 사람은 자기 하나 뿐이야……. 사랑… 사랑… 사랑…. 사랑… 사랑해….. “

 

 

 

 

 

 

 

 

현관문이 닫기고 그녀가 떠나가고…. 켜져 있는 센서등이 언제쯤 꺼질까 불안한 듯 시력을 맞춥니다.

 

 

‘ 그녀의 흔적은 저 센서등이 꺼지기 전까진 아직 살아 있는거야…

 

 

저 센서등도 그녀 때문에 켜진거니까………..

 

 

 

만약 저 등이 안꺼진다면……

 

 

 

그럴일은 없겠지만 정말로 안꺼진다면……

 

 

 

그렇다면 그녀가 다시 내게 돌아올지도 몰라………….

 

 

 

그러니까 제발 꺼지지마…………. ‘

 

 

 

 

 

 

 

 

 

 

한 참을 울었나 봅니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눈두덩이가 너무 부어 눈을 뜨기도 힘듭니다.

 

 

눈가가 따갑습니다.

 

 

그녀가 가져 왔던 소주병.. 맥주잔……..

 

 

다시 보고싶다………….

 

 

‘ 가져갔나? ‘

 

 

 

 

띠리리링 띠리리링

 

 

핸드폰이 울립니다.

 

 

 

“ 아침에 내가 전화한댔지? 너 어제 그렇게 찾아온거 혼날 줄 알아! 빨랑 씻고 옷입고 주차장에 나와서 대기해! “

 

 

그럼 어제밤 일은….

 

 

 

 

 

현실 같은 꿈.

 

 

 

 

 

썬과 그 남자, 그리고 나 셋이 술을 마신 뒤 함께 그녀를 집에 바래다 주고 우린 또 다시 술을 마셨습니다.

 

인간으로써, 남자로써. 아니 그냥 남자가 아닌 썬을 간절하게 원하는 사랑하는 사람으로써.

 

 

언제가 되었든 그녀의 선택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우리 둘은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아까 말했듯, 사랑이란 전쟁에서 간절함이라는 무기를 들고는 이기지 못한다는 것은 진리이니까요.

 

그리고 그녀가 저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꿈만 같았던 어젯밤의 꿈은 꿈으로 끝났습니다.

 

 

 

그녀는 나를 선택했고, 우린 그 남자의 출국을 함께 배웅 해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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