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꾼 - 인생의 희노애락을 담다

여친이 제대로 열받았네요.

 

높낮이도 없는 목소리로 “ 뭐했어 “

 

걍 귀찮다는듯이 “ 혼자 좀 화나는 일이 있어서 술좀마시다 잠들어서 벨소리 못들었나봐 “

 

화장실 안쪽에서 문고리를 붙잡은 채로 여친이 “ 그렇게 두드렸는데도 ? “

 

“ 아 정말 안들렸다니까 들렸으면 내가 바로 나갔지. 봐바 혼자 마셨다니까 “

 

두팔로 방을 휘이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갑자기 여친이 걸어나오며 창문을 열더니 밖을 내다보네요. ㄷ ㄷ ㄷ

 

여자의 직감……. 경이로울뿐이죠.

 

 

 

겨우 사태가 수습되고.

 

“근데 너 진짜 아무리 화가 났어도 신발신고 들어오고 앞으로도 그럴래? “

 

아직도 화가 덜 풀렸는지 “ 미안하긴한데 너도 조심해 “

 

“아니 뭘 조심해? 혼자 술도 못마셔? “

 

“ 핸폰은 왜 껐어? 분명 신호음 한번 울리다가 전원꺼졌다고 나왔던거 같은데 “

 

“그래? 핸폰.. 그러고보니까 내 핸폰 어디있지? “

 

또 걱정이 되더군요.

 

지금은 여친이랑 같이 있는 상황이라 그냥 꺼놓은것도 아니고 밧데리를 분리해놔서 그걸 찾아내면 여친한테 뭐라고 설명을 해야할지 막막했으니까요.

일단 찾은 다음에 이불속에서든 어디서든 재빠르게 밧데리 끼울 생각으로 여친보다 내가 빨리 찾는게 중요했으므로 열심히 찾는 척을 했습니다.

 

근데 아무리 찾아봐도 핸폰이 안보이는겁니다.

진짜로… 안보이네요.

 

“학교에 두고왔나? “

 

“쫌 이상하다….너……. “

 

“ 아니라니까 그러네 진짜. 내일 일어나서 다시 찾아보자. “

 

 

아침이 되었습니다.

 

여친이랑 10시쯤 일어나서 학교근처 식당에서 가서 밥을 시켜놓고 있는데(아직까지 제 핸폰은 못찾음)

 

여친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 여보세요? “

 

뚝.

 

“ 뭐지? 받으니까 끊기네. “

 

그거 아시나요…

 

그냥 불안한 예감… 근데 웬지 딱 맞을 것 같은 예감….

 

아무렇지 않은척하며 “ 아 맞다 나 동아리방에 전화좀 하게 핸폰 좀 줘바 “

 

여친 핸폰으로 최근통화목록을 봤습니다.

 

 

 

 

 

 

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

 

그 ㅊㅈ 의 핸폰번호………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

 

 

이 ㅊㅈ가 어떻게 제 여친 번호를 알까요…그리고 왜 여친한테 전화를 걸었고 왜 그냥 끊었을까요….

 

‘ 아… 얘가 어제 나갈 때 내 핸폰 들고간거네…. 와…미치겠다….. ‘

 

밥이 목구멍으로 안넘어갑니다.

 

또 전화가 올까봐 걱정만 앞섭니다.

 

어제밤을 살벌달콤하게 살아남았는데 이제 더 살벌한 상황이 저에게 엄습해옴을 느끼며

 

모래 씹는 심정으로 밥을 입에 쳐넣었습니다.

 

 

“ 영화보러 갈까? “

 

“ 영화 재밌는거 뭐하는데? “

 

“ 몰라 극장가서 고르면 돼지. 일단 가자. “

 

 

여친의 핸폰을 장시간 꺼두기 위해 극장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별 사고없이 여친과 저는 그날 밤 터미널에서 헤어지고….. 저 혼자 집으로 돌아왔죠.

 

 

 

집에 오자마자 컴퓨터를 켜고 ㅊㅈ의 전번을 확인하고 공중전화로 나가 전화를 걸었습니다.

 

바로 받는군요.

 

“ 어제는 미안했어. 잘 들어갔어? “

 

“ 덕분에 참 평생 남을 추억 만들어줘서 고맙네… 잘하면 나 머리끄댕이 잡힐뻔 했다? 그지? “

 

“ 아.. 정말 미안해….. 근데 혹시 너가 내 핸폰 가져갔어? “

 

“ 너한테 또 연락올까봐 번호지우려고 핸폰 켰는데 하도 니가 쫓아내서 그냥 어쩌다보니 들고나온거야. “

 

“ 근데 낮에 내 여친한테 전화는 왜 걸었어? “

 

“ 너 그거 따질려고 전화한거야? “

 

“ 아니 그냥 궁금해서 그러지… “

 

“ 잘들어왔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전화하려다가 말았다 왜? 됐냐? “

 

이 순간에 농담을 하다니…… 딴에는 저 안심시키려고 하는 것 같기도 하더군요.

 

다행이 이 ㅊㅈ가 크게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아보여서 더 이상 전화 건 이유는 묻지 않고

핸폰을 돌려받기 위해 약속을 잡았습니다.

 

“ 어제 거기서 볼까? “

 

“ 왜 또 술마시려고? 나 이제 너랑은 술 안마셔. 그냥 우리학교 정문으로 와. “

 

전화를 끊고 바로 여친한테 전화를 걸었습니다.

 

“ 핸폰 동아리방에 있다네. 전화거니까 동생이 갖고있으니까 오래. 가서 고맙다고 술이나 한잔 사주려고. “

 

 

 

ㅊㅈ를 만나러 00대학교 앞으로 향했습니다.

 

어색하더군요.

불과 하루가 안지났고 처음 본 날 깊은 관계까지 간터라 게다가 짧은 시간동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스펙타클까지 경험한 사이라서 더더욱..

 

ㅊㅈ 가 먼저 말을 꺼냅니다.

 

“ 밥이나 사줘 그럼. “

핸폰 돌려받으려면 사줘야죠…. “ 뭐 먹으러 갈까? “

 

“ 회. 아주 아주 비싼걸로~~ “

 

자취생이 뭔 돈이 있겠습니까. 현금카드에 남아있는 이번달 용돈뿐인데 회 사먹으면 오링날판이네요.

어쨌든 어제 일도 있고해서 ㅊㅈ 의 차를 타고 ㅊㅈ 가 잘 안다는 횟집으로 갔습니다.

 

 

등원참치.

헐….

광어나 우럭도 아니고 참치회….

 

“ 여기 참치정식 두개랑요 소주 두병이랑요 맥주컵 두개 주세요. “

 

“ 나랑 술 안마신다며? “

 

“ 너랑 안마셔 나 혼자 마실꺼야. “

 

“ 장난해? 근데 잔을 두개 달래? “

 

“ 너 사이다 시켜마시라고 ㅋㅋ”

 

 

어제랑은 또 다른 모습이네요. 그렇게 우린 또 그날도 술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그 ㅊㅈ의 남친 얘기까지 듣게 되었네요.

현재 유학가있는데 2년후에나 우리나라에 들어올 예정이라고.

끼리끼리 논다는 말이 맞나봐요.

이 ㅊㅈ도 꽤나 있는집 ㅊㅈ 같았는데 남친 전공이 덜덜하더군요.

 

얘길 하면 할수록 괴리감이 깊어지는데 이상하게도 이 ㅊㅈ 의 말투 하나하나가 그렇게 예쁘고 귀여워보이더군요.

원래 애교가 많은건지 아니면 나를 물먹이려고(혹은 어제일의 복수) 작정하고 이러는건지 도무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냥 속으로 ‘ 원래 누굴 처음 만나면 다 호기심때매 좋아보이는거야… 지금 내 여친 첨 만났을때도 그랬으니깐… ‘

 

 

밤 11시가 넘어서자 제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 이만 가봐야겠다. 이틀 연짝으로 술 마셨더니 힘들어. 그리고 내일 월욜이라 학교도 가야하고. “

 

“ 그래 오늘은 안바래다 준다? 조심해서 들어가. “ 토닥토닥.

일어나는 내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팡팡 치네요.

 

빌지를 들고 계산대로 갔습니다.

“ 계산하셨는데요? “

 

“ 아 예.. “

 

“ 가자~ “

 

“ 언제 했대? “

 

“ 너 담배 피우러 갔을 때. “

 

“ 나보고 내래매? “

 

“ 어제 나 재워줬잖아. 아침까지 안깨우고 재워줬으면 더 맛있는거 사줬을텐데 밥탱. “

 

“ 어… 그래.. 이쁘다 너… “

 

나도 모르게 이쁘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집에 돌아온 후 화장실에 들어가서 물을 틀어놓고 거울을 봤습니다.

 

‘ 걔도 이 거울앞에 섰었겠지? 근데 지금은 안보이네…. ‘

 

웬지 모를 아쉬움을 누르며 여친에게 전화를 겁니다.

 

집에 잘들어왔고 이제 곧 잘꺼고 너도 잘자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면 나 모닝콜 해달라는

흔한 얘기 몇마디를 주고 받고….

 

“ 사랑해 잘자 “

 

라며 전화를 끊습니다.

 

과연 사랑하긴 하나…

 

 

이후 3개월동안 그리고 겨울이 찾아 올 동안 ㅊㅈ 와 나와의 만남은 은밀히 지속됩니다.

이제 주말을 피해 주중 수업이 끝난 오후에 만나 영화도 보러 가고 쇼핑도 하며

나를 모르는 사람들이 볼 때는 다정한 연인이 되어 거리를 돌아 다닙니다.

 

“ 팔짱 좀 껴줘라~ 응? “

 

“ 걸어다닐 때 넌 안불편해? 난 팔짱 끼면 불편하던데. “

 

늘 여친은 불편하다며 팔짱 끼는걸 싫어했습니다.

 

이 ㅊㅈ 는 저의 팔을 붙잡고 걷거나 팔짱을 꽉 끼고 걷는걸 너무 좋아했습니다.

 

 

 

 

 

 

6개월 전.

 

여친과 심하게 싸운 어느날이었습니다.

전화로 싸우다가 홧김에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고 전원을 꺼버렸습니다.

몇시간이 지났을 까… 홀로 방안에 앉아 우두커니 모니터만 바라보다가 울고 있을 여친이

걱정돼서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를 않습니다.

 

‘ 내가 좀 심했나보다… 집으로 걸자. ‘

 

여친 부모님과도 친하고 가끔 방학때는 여친의 아버님 일도 도와드리곤 해서 새벽만 아니면

전화를 거는게 어렵지 않았습니다.

 

“ 네 어머님 전데요 따옥이 자나요? “

 

“ 아니 학교에서 과제한다고 밤샌다고 나갔는데? “

 

“ 아 그래요? 네 알겠습니다. 핸폰으로 걸어볼께요. 안녕히 주무세요. “

 

다시 여친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신호만 갈뿐 받지를 않습니다. 문자를 넣고 음성을 남겨도 연락이 없는 여친…

새벽 2시.

잠도 못자고 의자에 앉아 핸폰만 만지작 거리는데 복도에서 익숙한 발소리가 들리길래

번개같이 현관으로 달려나가려는 찰나 뭔가 다른 소리가 나는 것 같아서 구멍으로 내다 보았더니.

 

 

여친에게 웬 남자가 이마에 뽀뽀를 해주더군요.

그리고 남자는 뒷모습만 보이고 손을 흔들며 건물을 빠져나갔습니다.

 

순식간에 풍선에 바람이 빠지는 것 처럼. 털석 자리에 주저앉았습니다.

 

“ 딩동 “

 

여친의 어머님과 통화 후 학교 간다고 거짓말해놓고 나에게 올꺼란 생각에 문도 안잠그고 기다렸기에. 그대로 바닥에 털석 앉은채로 있으니 여친이 문을 열고 들어왔습니다.

 

길도고 짧은 침묵.

 

서로간에 아무런 말이 없어도 1미터도 안되는 둘 사이의 공간에 무거운 공기가 가득 찹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만지기도 버거울만큼 매우 무거운 공기…

 

아무말없이 무릎을 꿇고 내 손을 잡고 눈물만 흘리는 그녀를 한참을 쳐다보지도 않다가

던진 한마디

 

“ 늦었으니까 여기서 자고 가. 난 동아리방으로 갈께. “

 

 

 

 

 

 

저와 싸운 여친은 엄마에게 거짓말을 하고 저를 만나기 위해 터미널로 향했습니다.

서둘러 달려온 터미널에는 이미 막차가 끊겼죠.

이미 집에는 학교에서 밤을 샌다고 하고 나온터라 갈 곳도 없는데 무조건 나에게로 가야하는데

갈길이 막막해하던 와중에 택시를 타고 장거리를 달려오게 되었습니다.

 

한시간 가까이 오는 도중에 여친은 어쩌다보니 택시기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됐고

저와 조금전에 싸운 얘기를 하다가 택시기사가 위로해주겠다며 바에서 칵테일 한 잔 하겠다는 말에 <남친과 싸운 홧김> 무리한 동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큰 사고는 없었지만 택시기사는 그 야밤에 술집까지 같이 따라온 젊은 여대생의 매력에 취하고

여친은 자기 얘길 들어준 그 사람에게 취하고 저의 집까지 바래다준 후 복도에서 이마에 키스를 하게 되었던 것이죠.

 

 

 

 

그녀의 말을 믿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우린 지난 시간보다 더 간절하게 서로를 믿기로 하고 다시 예전으로 돌아왔습니다.

 

 

 

“ 강의 끝나면 정문앞 피자집 주차장으로 바로 나와. 같이 갈데가 있어. “

 

“ 아직 두시간이나 남았는데 왤케 일찍왔어? 주차장에서 기다릴꺼야? “

 

“ 나 안그래 보여도 혼자 잘 놀거든? 거울보고 놀면 시간 가는줄 몰라 ㅋㅋ “

 

“ 어 그래 예쁘세요.. 어련하시겠어요… 재수없어요 ㅋㅋ “

 

시내에 새로 생긴 패션몰로 끌려간 나는 1층에서부터 꼭대기 층까지 ㅊㅈ 의 손에 이끌려

애완견마냥 졸졸 따라다녀야 했죠.

 

“ 야 난 진짜 너랑 코드가 달라서 너가 뭘 좋아하는지 모르겠다니까? 그나마 내가 몇안되는 쇼핑을 좋아하는 남자라서 다행이지 다른 남자였음 벌써 너 차였어. “

 

“ 언제 우리가 시작은 했어? 차이게? 잔말말고 잘 따라댕겨! “

 

명품매장앞에 멈춰 선 그녀.

어랏. 여긴 남성의류인데? 설마?

 

흡사 마네킹에 옷 대보는 것처럼 매장에 걸려있는 온갖 셔츠를 나에게 걸쳐보더니

구경만해도 구역질이 날만큼 반짝이고 휘황찬란해서 무슨 나이트 사이키조명 같은 셔츠를 점원에게 결제해버리는 ㅊㅈ.

 

799,000원

 

“ 내 생전에 이런 옷을 다 입어보네. “

 

장난스럽게 웃으며 ㅊㅈ가 “ 좋지? 그지? “

 

“ 야 진심 좋은게 아니라 이거 입고 밖에 다니라고? “

 

“ 너한테 되게 잘어울려. 나 만날때만 이거 입어. 여친만날때 입으면 죽는다. “

 

 

 

 

쇼핑을 마치고 그녀의 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오늘은 주중이고 여친도 요즘 과제가 많아서 학교에서 과제하고 거의 새벽녁에나 집에 귀가를 하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안심하고 ㅊㅈ 와 저는 쇼핑백을 여러 개 들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주차를 시키고 건물로 들어서는데.

 

“ 어머 깜짝이야! “

 

ㅊㅈ 의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복도 저편에서 여친이 ㅊㅈ 의 손목을 잡은 채 절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ㄷ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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