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꾼 - 인생의 희노애락을 담다

아저씨를 처음 만났을 때 저는 '순간 포착, 세상에 이런일이’ 3년 차 PD였습니다...

제보를 받고 산길을 올라올라 도착한 마을, 그곳에서 무려 23년 간 세상을 떠나 살아온 진짜 자연인 '씨돌 아저씨’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맨발로 전 세계를 여행하고 싶습니다

씨돌 아저씨의 첫인상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자연인'을 넘어 '원시인'에 가까웠습니다.

 

아저씨는 옷을 벗어 던지고 소나무를 껴안으며 나무의 숨소리를 느끼기도 하고,

길을 가다 갑자기 황토구덩이에 머리를 묻고 흙의 향을 맡기도 했습니다.

 

“겨울에 눈이 오면, 고라니 같은 게 지나가잖아요. 그러면 누가 고라니를 따라가 잡을까 봐, 일부러 그 발자국 다 지운 사람이에요. 따라다니면서 고라니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게. (웃음) 그런 사람이에요. 그 사람이.”

(송재갑/ 봉화치 마을 주민)

 

대관절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저씨의 순진무구한 행동 때문이었을까요??

방송은 그야말로 대박이 났습니다. 그 이후, 매년 휴가 때면 아저씨를 찾아갔습니다.

‘그것이 알고싶다’를 담당하게 되면서 점점 더 혹독한 상황을 겪어야 했기에, 아저씨를 만나야 비로소 제대로 숨을 쉴 수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아저씨의 인생을 - 되짚어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예상외로 너무나 놀라웠습니다.

 

군대에서 실시된 최초의 부재자 투표

1987년, '대통령 부재자 투표에서 여당 대표를 뽑지 않았다고 구타당해 숨진 故정연관 상병의

'억울한 죽음이 있었습니다.

 

'정연관 상병의 억울한 죽음의 진실을 파헤치고 '민주화 운동에서 숨진 '열사들의 부모들을 챙기며 '누구보다 앞장서 투쟁하고 '정의를 위해 몸 바쳤던 청년의 이름은 요한이었습니다.

 

[임분이] 정연간 상병 어머니

요한이가 우리집에와서 대문 앞에 서서 나를한번 안아 주더라고 어머니 고생 많이 했다고

그의 노력 끝에 정연관 상병의 의문사는 뒤늦게 인정되었습니다. 그 후 요한은 정연관 상병의 어머니를 '안아준 뒤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김씨돌] 산소호흡기! 산소호흡기 가져와!

시간을 돌려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당시,

사람들을 구하겠다고 한달음에 달려와 구조현장에 매달린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순수해보이는 사람이 구조 현장에서는 굉장히 강하게 매달려서 목숨 걸고 했어요

'그는 생존자를 구출하고 언론사에 재난구조 시스템을 개선해야 한다고 '호소하며 세상을 바꾸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펼쳤습니다.

 

[고진광] 삼풍 백화점 사고 민간구조단장

그건 아니고, 기자가 왔다고 하니까 정작 바지더라고 전 괜찮아요 그런 식으로

 

자연을 지키고, 삼풍백화점 참사 현장에서 생명을 구했던 이는 '바로 씨돌 아저씨였습니다.

'독재정권과 민주화 움직임 속에서 '목숨을 잃은 젊은이들의 가족을 돌보며 '진실을 밝히려 했던 청년 요한.

씨돌은 바로 그 요한의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김씨돌 김요한 해맑게 웃던 씨돌 아저씨, 총명하게 눈을 빛내던 요한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우측 반신마비에 언어장애로 소통이 안 되고 더 이상 뇌의 회복을 기대하기 힘듭니다.”

 

손병철 교수/신경외과 전문의

오른쪽의 장애를 왼쪽으로 극복할 수 있도록 재활 치료가 꼭 필요합니다.

 

민주화 운동하던 때의 후유증으로 뇌출혈에 시달려오다 쓰러진 요한, 씨돌은 현재 요양원에서 기초생활수급자인, 용현으로 살고 있습니다.

 

용현 자인인 씨돌 - 운동권인지 뭔지 해서 두들겨 맞고 응어리가 생긴걸

 

아저씨를 담은 SBS 스페셜 방송이 나간 뒤 “저 사람이 나도 도와줬다”며 국내외에서 30건 넘는 제보가

쏟아졌습니다.

 

'솔잎을 방에다가 깔고 자고일어나면, 되게 좋아요'

 

함께 다큐를 만든 제작진이 '그것이 알고 싶다' 스탭이라 뭘 찾아내는 데는 선수인데도 미처 알아내지 못한 일들이

많았습니다. 촬영 막바지에 아저씨의 컨디션이 좋았을 때 "왜 이런 희생적인 인생을 사셨나요?" 라고 질문하는데 마음이 벅차 눈물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이 정작 선생님께 도움되거나 관계되는 일은 없었아요

질문을 들은 아저씨의 왼손이 주저 없이 움직였습니다.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

세 개의 이름으로 세 가지의 삶을 살았던 한 남자의 이야기

 

[배은심] 이한열 열사 어머니

요한 선생님은 우리들이 아무것도 몰랐을 투쟁 현장의 제일 앞에서 우리들을 인도한 사람이에요

“요한 씨는 우리가 아무것도 몰랐을 때 '우리들의 투쟁 현장 제일 앞에서 '우리를 인도한 사람이에요”

(배은심/ 故이한열 열사 어머니)

 

요한이는 제일 앞장서서 제일 많이 두들겨 맞았어요

“요한이를 처음에 만났을 때는 '저런 미친놈이 있대?라고, 즈그 식구는 아무도 죽은 사람이 없는데,

'남의 일만 갖고 저렇게 몸을 다 그냥 부수고 있구나. 요한이 제일 앞장서 갖고 제일 많이 두들겨 '맞는 놈이야. 고마웠지.” (허영춘/ 故허원근 열사 아버지)

 

“남을 위해서 아무 대가가 없는데

'자기 몸을 다쳐가면서까지 '저렇게 일하는 사람. 제가 가까이 본 사람 중에 요한 씨 같은 분이 없었어요.”

(윤순녀/ 노동 운동가)

 

아저씨를 취재하며 제일 많이 들었던 말이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화려하고 아름다운 꽃인데, 우리는 그 꽃을 피운 사람에게만 주목했다.

그 꽃을 피우기 위해 뿌리가 되고, 줄기가 된 수많은 사람들은 주목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민주화 운동을 하며 끌려가 맞아서 몸은 피폐해지고, 구속되는 바람에 정상적인 사회생활도 못하고, 그런 분들이 많습니다. 이름도 명예도 없이 잊혀져간 분들이죠. 빛나지도 않고, 이름도 없지만 묵묵히 자리를 지켰던 수많은 용현들이 기억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김용현

'아저씨, 아저씨는 남을 돕는 일이 왜 좋으셨어요?

“질문이 잘못됐어. 돕는다는 생각 안했어. '내 맘 가는대로, 양심이 가는대로.

'아무것도 아니야”

(요한, 씨돌, 용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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